독서칼럼

시는 부활할 것인가?

온 독서논술 2014. 11. 4. 07:07

시는 부활할 것인가?

 

아이폰6가 인기다. 그런데 아이폰6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논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폰의 아버지 스티븐 잡스의 정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스티븐 잡스는 한손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아이폰이어야 한다는 철학 때문에 3.5인치를 고집해왔다. 삼성 갤럭시노트가 5.7인치 대화면을 선보였을 때 잡스는 그런 정책을 경멸까지 했었다. 그런데 잡스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 팀 쿡은 5.5인치 아이폰6플러스를 내어놓음으로써 잡스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화면 크기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거기에는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TV와 데스크탑 모니터는 그동안 계속 화면 크기를 키워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떻게 하면 더 뛰어난 화질을 구현할 것인가가 큰 과제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110인치(280cm) TV도 나올 정도이다. 물론 1억 3천만 원이 넘는 고가이기에 일반인에게는 그림의 떡이지만 말이다.

반면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의 경우 무턱대고 크기 경쟁을 벌일 수 없는 것이 이동성과 휴대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가볍게 들고 다녀야 하고 특히 스마트폰의 경우 손에 들고 다녀야하기 때문에 큰 화면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화면이 작으면 아무래도 영상을 볼 때 답답하고, 특히 한 화면 안에 담을 수 있는 텍스트의 양이 적어서 이른바 스크롤 압박이 심해지는 단점이 있다.

스마트폰 시대에 앱이라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대화면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편하게 볼 수 있던 것을 작은 화면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도록 매체 환경에 맞게 조정해주는 작업이다. 물론 요즘은 아예 처음부터 스마트폰만을 위해 앱을 개발하지만 말이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이런 문제는 하드웨어적 측면이고, 개발자들이 신경 써야 할 일이라서 사실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다만 컴퓨터 대화면에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과 스마트폰 작은 화면에 보일 수 있도록 글을 쓰는 것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실질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원고지에 글을 쓰고, 지면을 통해서 발표할 때는 글 자체가 중요했다. 그 글에 필요한 이미지 또는 사진 자료는 별도의 전문가 영역이었다. 그런데 블로글에 글을 올리면서 텍스트로 꽉 찬 화면 대신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래서 텍스트 못지않게 적절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것은 아마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으로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환경의 변화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결국 매체의 변화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파워블로거로 재탄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커다란 모니터와 달리 작은 화면을 통해 글을 전달해야 하는 입장에서 글쓰기는 또 다른 고비를 맞게 된다. 손바닥 만한 화면에 내용을 다 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긴 글은 환영받지 못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내가 밴드에 글을 올릴 때 친구가 댓글로 “이 긴 글을 설마 내가 다 읽으리라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말한다. 원고지 4~5장 정도의 글도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엄청 긴 글이 되는 것이다.

사실 트위터가 140자로 자신을 표현하라고 한 이유가 있고, 문자나 카톡처럼 단문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대세인 까닭이 결국은 매체 환경의 변화로 촉발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SNS 시인 하상욱의 10~25자짜리 단문시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란 무엇인가? 시는 산문에 비해 짧은 것을 생명력으로 하고 있다. 짧은 글이기에 많은 것을 과감히 생략하고, 대신 상징과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시에는 직관적 통찰력이 담겨 있다. 굳이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는다. 척하면 척이어야 한다. 그런 시는 문학의 시조로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왔다. 그러다가 더 이상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고, 시집이 팔리지 않는 고비를 맞아 침체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심지어 거의 유일하게 시를 즐겨 읽고 있다는 우리나라에서도 더 이상 베스트셀러 시집이 나오지 않은지 꽤 오래이다. 그런데 짧은 글쓰기를 요구하는 스마트폰 시대의 글쓰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시인의 글쓰기, 시인의 감성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과연 다시 시는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는 것일까? 시가 차갑고, 네모난 스마트폰에 온기를 불어 넣어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난 틀렸다. 일단 난 시를 쓰지 못한다. 써본 적도, 쓰고 싶었던 적도 없다. 게다가 짧은 글쓰기가 대세라는 글을 이렇게 길게 쓰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모두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살아남고 또 누군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마치 거대한 공룡이 사라지고, 작은 동물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닌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문제의 패러다임을 잘못 설정해서 맞다 틀리다 따져봐야 괜히 입만 아프다. 그나저나 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