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2일 여행 (셋째 날) -
그래서 산 중간에 영화 ‘서유기’의 셋트장이 아직도 마련되어 있다.
그 화염산을 지나 도착한 곳이 바로 ‘천불동’이다. 사실 중국에는 여기 저기 ‘천불동’이 있다. 부처님을 천 분 모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처님을 많이 모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마치 우리가 ‘백과사전’할 때 ‘백’자가 꼭 백가지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말이다. 여기서도 역시 중국의 장대한 스케일을 느낄 수 있다.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백자극리천불동’은 트루판 시에서 45km 떨어진 화염산 중단의 목두구라는 강 계곡 서쪽 낭떠러지에 조성된
특히 독일의 폰 르콕이 그 상당량의 벽화를 뜯어 가서 베를린 박물관에 두었다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으로 인해 많은 양이 불타 없어졌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동굴은 ‘마니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높았다. 들어본 적조차 없던 ‘마니교’는 현재 이란 지방에서 ‘마니’라는 사람이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로 창립한 종교로서 현재는 거의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 후 우리는 발길을 돌려 고창고성으로 이동했다. 후한 때 건설되어 멸망할 때까지 2000년 역사를 폐허의 흔적으로만 간직한 곳으로 역시 화염산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교하고성’이 토굴 형식으로 지어진데 비해 ‘고창고성’은 흙벽돌로 축척된 사각형으로, 벽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버들가지나 마른풀을 섞었는데 황국이 멸망한 후 농부들이 벽돌을 깨서 비료로 쓰는 바람에 지금은 폐허가
이곳을 보니 로마의 콜로세움이 생각났다. 그곳 역시 건축자재가 필요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그 모습을 잃어갔지 않았던가?
또한 이곳은 현장법사가 설법을 펼쳤던 곳으로도 잘 알려졌다.
이곳에서도 전통의상을 입은 위구르족이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챙긴다.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남학생에 이끌려 우리 일행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또한 각 고분에는 벽화로서 그 묻힌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상인의 무덤에는 새들을 통해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고, 공자 사상을 나타내는 벽화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신강 최대의 고탑인 ‘소공탑’이었다. 이슬람 양식의 독특한 탑으로 청나라 때 첫 투루판 군왕이 된 애민호자를 기리기 위해 1777년 아들 술라이만이 지은 탑이라고 한다. 사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건포도 판매. 참 놀라운 판매기술이었다. 건포도에는 나름대로 이름이 붙어져 있어서 명품다움을 증명했다. 결국 좋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 ‘태양초’처럼 자연적인 바람에 잘 말린 것이 좋은 건포도였고 인위적으로 짧은 시간에 화학적인 방법을 써서 말린 것이 질 떨어지는 건포도였다.
그렇게 대접을 잘 받고 찾은 곳은 ‘카레즈 박물관’이었다. 사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생각하면서도 그 물이 어디서 왔을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카레즈’는 정말 큰 문화 충격이었다. 투루판은 한해 강수량이 1-20m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증발량은 그의 수백배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어찌 물이 있을 수 있을까? 어찌 곡식들과 과일들이 자라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바로 그 비밀은 ‘카레즈’에 있었다.
그래서 만리장성, 대운하와 더불어 카레즈를 중국의 3대 건축 사업이라고 얘기한다고 한다. 그동안 만리장성만 들어서 알았지 카레즈는 알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카레즈가 훨씬 더 웅대해보였다.
특히 골목길이라고 해야할지 굽이굽이 난 길은 뜨거운 날씨만 아니었다면 한껏 낭만을 부려보고 싶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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