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2007여름실크로드

- 8월 2일 여행 (셋째 날) -

온 독서논술 2009. 9. 27. 21:17

- 8월 2일 여행 (셋째 날) -

 

우리 나라 산에는 아무리 작은 동네 앞산이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이름이 있다. 그런데 중국 산에는 그냥 ‘산’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워낙 산이 많다 보니 일일이 명칭을 붙이기 어렵다고 한다. 여기서도 대륙의 기질을 엿볼 수 있었다. 처음 방문하는 화염산은 약 1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으로 트루판 분지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홍사암으로 이뤄진 산으로 한 여름의 지표 온도가 약 80도에 달하는 아주 뜨거운 곳이다. 그 산의 모습이 마치 괴물의 발톱과 같아서 절로 악마의 소굴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드는 산이었다. 이 산이 바로 ‘서유기’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산 중간에 영화 ‘서유기’의 셋트장이 아직도 마련되어 있다.

그 화염산을 지나 도착한 곳이 바로 ‘천불동’이다. 사실 중국에는 여기 저기 ‘천불동’이 있다. 부처님을 천 분 모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처님을 많이 모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마치 우리가 ‘백과사전’할 때 ‘백’자가 꼭 백가지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말이다. 여기서도 역시 중국의 장대한 스케일을 느낄 수 있다.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백자극리천불동’은 트루판 시에서 45km 떨어진 화염산 중단의 목두구라는 강 계곡 서쪽 낭떠러지에 조성된 굴 사원이다. 트루판에 현존하는 석굴 중 제일 크고, 벽화의 내용도 가장 풍부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가보니 이미 벽화는 도굴꾼들에 의해, 때로는 타 종교인들에 의해, 또는 외래 고고학자들에 의해 뜯기고 상한지 오래였다.

특히 독일의 폰 르콕이 그 상당량의 벽화를 뜯어 가서 베를린 박물관에 두었다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으로 인해 많은 양이 불타 없어졌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부처님의 눈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여 눈 부위만 모조리 긁어가는 인간의 탐욕도 여지없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동굴은 ‘마니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높았다. 들어본 적조차 없던 ‘마니교’는 현재 이란 지방에서 ‘마니’라는 사람이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로 창립한 종교로서 현재는 거의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 후 우리는 발길을 돌려 고창고성으로 이동했다. 후한 때 건설되어 멸망할 때까지 2000년 역사를 폐허의 흔적으로만 간직한 곳으로 역시 화염산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교하고성’이 토굴 형식으로 지어진데 비해 ‘고창고성’은 흙벽돌로 축척된 사각형으로, 벽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버들가지나 마른풀을 섞었는데 황국이 멸망한 후 농부들이 벽돌을 깨서 비료로 쓰는 바람에 지금은 폐허가 되어 그 윤곽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곳을 보니 로마의 콜로세움이 생각났다. 그곳 역시 건축자재가 필요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그 모습을 잃어갔지 않았던가?

문화유산에 대한 무지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역시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의 한자락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입장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이곳은 현장법사가 설법을 펼쳤던 곳으로도 잘 알려졌다.

오히려 더운 날 어른 여남은 명을 태우고 고갯길을 올라야 하는 당나귀 신세가 자꾸만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도 전통의상을 입은 위구르족이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챙긴다.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남학생에 이끌려 우리 일행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 다음 찾은 곳은 아스타가 고분이었다. 이 고분은 고대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의 공동묘지로 약 3-8세기에 걸쳐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아스타나는 ‘휴식’을 의미하는 위구르어로 그 당시 사람들이 죽음을 잠시 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미라들은 현재 우루무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중에 우루무치 박물관에서 그 미라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미라하면 이집트만을 생각하는지 절로 반성이 들었다. 이집트 미라들은 일부러 보존하기 위한 갖가지 처리가 되어 있지만 이 미라들은 자연 그 상태대로 보존되었으면 상태도 훨씬 좋았다. 물론 세월의 장구함은 이집트 미라를 따라가지 못할테지만 말이다.

또한 각 고분에는 벽화로서 그 묻힌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상인의 무덤에는 새들을 통해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고, 공자 사상을 나타내는 벽화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신강 최대의 고탑인 ‘소공탑’이었다. 이슬람 양식의 독특한 탑으로 청나라 때 첫 투루판 군왕이 된 애민호자를 기리기 위해 1777년 아들 술라이만이 지은 탑이라고 한다. 사실 이 정도의 이슬람 양식은 그 전에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보았기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

이채로운 점은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점이었다.

그 후 우리가 찾은 곳은 투루판의 명품 포도 농장이었다. 무희 몇 몇이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더니 곧 여러 종류의 싱싱한 포도를 푸짐하게 내어 놓았다. 음악이 나오더니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우리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건포도 판매. 참 놀라운 판매기술이었다. 건포도에는 나름대로 이름이 붙어져 있어서 명품다움을 증명했다. 결국 좋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 ‘태양초’처럼 자연적인 바람에 잘 말린 것이 좋은 건포도였고 인위적으로 짧은 시간에 화학적인 방법을 써서 말린 것이 질 떨어지는 건포도였다.

그렇게 대접을 잘 받고 찾은 곳은 ‘카레즈 박물관’이었다. 사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생각하면서도 그 물이 어디서 왔을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카레즈’는 정말 큰 문화 충격이었다. 투루판은 한해 강수량이 1-20m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증발량은 그의 수백배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어찌 물이 있을 수 있을까? 어찌 곡식들과 과일들이 자라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바로 그 비밀은 ‘카레즈’에 있었다.

사막을 둘러싼 천산 산맥의 만년설에 있는 물들을 사막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기술 그것이 바로 ‘카레즈’ 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땅으로 구멍을 뚫고 그 밑을 지하수로로 연결해서 물이 흐르도록 한 기술. 그 아이디어가 놀랍고 수천 갈래로 그 갈래 각각마다 적게는 몇 미터에서 깊게는 수십 미터까지 땅을 파고 간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 대운하와 더불어 카레즈를 중국의 3대 건축 사업이라고 얘기한다고 한다. 그동안 만리장성만 들어서 알았지 카레즈는 알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카레즈가 훨씬 더 웅대해보였다.

곧이어 교하고성으로 갔다. 교하고성은 고창고성보다 더 고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두 하천 사이에 치솟은 30m 벼랑 위에 세워져 있었다. 특히 성을 돌로 쌓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지하로 파내려 가면서 축조했다는 점이다. 특히 대불사는 남북 80m 동서 40m의 큰 규모였는데 역시 그 흔적만이 남긴 채 지금은 풍화작용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몰라 보수작업이 한창이었다.

특히 골목길이라고 해야할지 굽이굽이 난 길은 뜨거운 날씨만 아니었다면 한껏 낭만을 부려보고 싶은 곳이었다.

이처럼 숨가쁘게 투루판을 둘러보는 일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저녁식사 때 민속 공연이 있었는데 낮에 포도원에서 본 춤 때문에 별 감흥이 없더니 미소년의 악기 연주에는 모두 생기가 돌아 그 악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